드록바. 베슬리 슈나이더르. 루카스 포돌스키. 후안마타가 뛰었던
갈라타사라이
오스만 제국이 존재하던 1905년에 졸업생 알리 사미 옌(Ali Sami Yen 1886~1951)이 친구들과 함께 갈라타사라이 고등학교[5]에서 결성한 축구 구단이다. 프랑스계 학교에서 배우던 이들이라 주요 구성원이 당시 귀족 자제들인 덕분에 자금력이 꽤 탄탄했다. 반대로 쉬크뤼 사라츠오울루(Şükrü Saracoğlu, 1887~1953; 페네르바흐체의 옛 경기장 이름) 소위를 비롯한 초급 장교, 사병 같은 이들이 모여서 창단한 라이벌 페네르바흐체 SK(Fenerbahçe SK), 노동자들이 쉬는 시간에 축구를 하면서 모인 베식타스 JK(Beşiktaş JK), 기타 대다수 튀르키예 쉬페르리그 구단과 차원이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갈라타사라이 뜻은 갈라타(지역명) 사라이(궁전). 연고지 경기장 주변에 있는 탑을 이용한 이름이다. 그 밖에 구단 이름을 아슬란(사자)이라 지으려고 했었던 점도 있어서인지 별명이 아슬란이다. 덕분에 라이벌 페네르바흐체(노란 카나리아), 베식타스(검은 독수리) 마스코트로 3파전을 벌이면서 이들 응원 구호용 그림들이 꽤나 과격하다. 대한민국의 지지대 더비-슈퍼매치에서 걸렸던 도발 걸개는 차라리 애교일 정도였다.
이후 구단은 성장해 축구뿐만 아니라 남녀 배구, 남녀 농구, 장애인 농구, 육상, 브리지, 마술(馬術), 유도, 조정, 요트, 레이싱, 수영, 수구 같은 종목에서도 팀을 보유한 거대 스포츠 클럽으로 성장했다. 정말 별에별 종목을 다 다룬다. 그래서 구단 이름도 FK(FUTBOL KLÜBÜ, 튀르키예어로 풋볼 클뤼뷔, 즉 축구 클럽)가 아닌 SK(Spor Klübü 스포르 클뤼뷔, 스포츠 클럽)으로 쓴다. 더불어 이건 이스탄불 라이벌인 페네르바흐체도 똑같은데 다만 또다른 라이벌인 베식타스 JK는 JK(Jimnastik Kulübü)로 쓰는데 체육 클럽이라는 뜻으로 다른 이름을 쓴다.
이들 3개 팀의 이스탄불 더비는 튀르키예 쉬페르리그에서도 가장 뜨겁기로 유명하다. 그 유래는 귀족 팀이던 갈라타사라이가 워낙에 재정이 빵빵해서인지 반대로 재정이 튼튼하지 못하던 다른 두 팀을 우습게 보았던 게 유래라고 한다. 그래서 돈 없는 팀이라고 팬들이 다른 팀을 야유하고, 다른 팀 팬들은 귀족 도련님들의 철없는 돈낭비 팀이라면서 대꾸했다. 여하튼 1920년까지 갈라타사라이는 페네르바흐체를 상대로 1패도 거두지 않았을 정도였으며 술탄 컵 같은 당시 오스만 제국 휘하 축구 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달리며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1922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면서 귀족들도 사라졌고 졸지에 갈라타사라이도 이제 재정 문제에 빠지게 된다. 경기 성적도 비슷비슷해졌고, 무엇보다 갈라타사라이와 페네르바흐체의 이스탄불 더비는 튀르키예를 주름잡는 유명한 더비이자 피파도 인정한 세계적인 더비가 되었을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갈라타사라이는 튀르키예에서 최고 인기 구단이다. 서포터 수가 2천만, 심지어 5천만 명이라는 주장마저 있을 정도이다. 튀르키예에게 독립하자며 무력 시위와 독립운동(튀르키예 입장에선 폭동과 테러)를 벌이던 쿠르드족 독립 단체 PPK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까지도 갈라타사라이 열혈 서포터였으며, 교도소에서도 축구 경기는 꼭 본다고 한다. 평소에 그를 테러리스트라고 하여 박대한 교도관들까지도 축구 경기가 있을 땐 외잘란과 같이 축구를 보며 환호했다.
튀르키예계들이 많은 독일 베를린에서 베를린 갈라타사라이라는 자매 팀도 창단하려다가 UEFA 규정으로 유럽 리그에서 자매 팀은 불가한다고 하여 흐지부지된 적도 있다. 똑같은 경우로 AFC 아약스가 벨기에에서 자매 팀 창단하려다가 역시 이 규정으로 포기하던 것. 하지만 비유럽 리그는 상관없기에 아프리카 남아공에 케이프타운 아약스 케이프타운 FC(Ajax Cape Town FC)라는 팀을 창단했었다.그러다가 2020년 이 구단을 팔아서 자매 팀이 없다. 구단도 이름을 케이프 타운 스퍼스 FC(Cape Town Spurs F.C.)로 바꿨다.
출처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