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은 페네르바흐체 여자배구팀에 뛰기도했지.
남자축구는 엠레 벨뢰졸루. 니콜라 아넬카. 하울 메이렐레스.루이스 나니. 디르크 카윗. 반 페르시. 메수스 외질등 굵직한 선수가 뛰었고 김민재가 나폴리로 가기 전 잠깐 뛰었던 곳이기도 하다
튀르키예의 프로축구 구단. 이스탄불을 연고로 하고 있다.
같은 이스탄불 연고팀인 갈라타사라이 SK와 베식타스 JK와 함께 튀르키예 쉬페르리그의 대표적인 명문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으며, 나머지 두 팀과 함께 튀르키예 3강팀으로도 분류되고 있다
1907년 오스만 제국 시절, 지야 송귈렌(Ziya Songülen), 아예툴라 베이(Ayetullah Bey), 네지프 오카네르(Necip Okaner)를 위시로 한 초급 장교들이 카드쾨이에서 창단한 축구단이다. 구단명은 연고지인 카드쾨이에 있는 등대 '페네르바흐체 등대(Fenerbahçe Feneri)'에서 유래했다. 1903년에 노동자들이 모여서 창단한 베식타스 JK, 1905년에 오스만 제국 귀족 자제들이 창단한 갈라타사라이 SK와 같이 이스탄불을 상징하는 3대 구단(사실 이 말고도 이스탄불스포르나 이스탄불 BB같이 이스탄불을 연고지로 하는 축구단은 10개가 넘으나 이 3대 팀에 압도적으로 가려져 2011-12 시즌에 죄다 2부 리그 이하로 강등되어 있다가 14-15 시즌에는 이스탄불이 연고지인 카슴 파샤가 1부리그다.)이었으나 초창기에는 귀족들이 중심으로 후원하던 갈라타사라이 SK와 달리 자금면으로 떨어져 비슷한 처지인 베식타스 JK와 같이 무척 고달픈 시절을 겪어야 했다.
1909년 처음으로 참여한 공식 대회인 술탄컵에선 갈라타사라이에게 0:2 패배를 당한 뒤로 1921년까지 갈라타사라이를 상대로 공식경기 24전 전패, 비공식 친선전으로도 15전 전패를 당하며 단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이 굴욕적인 초창기 역사 때문인지 갈라타사라이와 원수지간 라이벌이 되어 이스탄불 더비로 알아주게 된다.
그래도 어려운 사정 속에서도 1911~1912 시즌 첫 시즌 오스만 챔피언십 리그 우승을 기록했다.
갈라타사라이의 독주가 이어지다 1922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할 무렵,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튀르키예 공화국 건국과정에서 양팀의 사정이 뒤바뀐다. 구 기득권층인 오스만 귀족들이 대부분이던 갈라타사라이로선 아타튀르크와 반목하던 반면, 대조적으로 초급장교와 사병들이 주축을 이룬 페네르바흐체는 오스만 제국 타도에 앞장서면서 갈라타사라이는 자금면에서 몰락하고 페네르바흐체가 탄력을 받게 되었다. 그 뒤로 둘은 만나기만 하면 아주 난장판으로 경기를 벌였다. 1952년 이스탄불 리그가 창단되면서 두 팀이 베쉭타쉬와 같이 리그 우승을 독점했고 다시 튀르키예 전역으로 리그가 재편된 튀르키예 쉬페르리그 이후로 1959년 쉬페르리그 초대우승을 거쳐 현재까지 페네르바흐체는 리그 19회 우승을 거두고 있다.
갈라타사라이가 서포터 수가 더 많고 클럽 국제대회(UEFA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점을 내세우는 데 비해, 페네르바흐체도 인기면에서 뒤쳐지지 않는데다가 갈라타사라이와의 팀간 상대전적에서 앞서기 때문에 서로가 튀르키예 쉬페르리그 1인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쉬페르 리그 우승횟수는 갈라타사라이가 22회로 페네르바체의 19회보다 약간 앞서지만, 준우승 횟수는 갈라타사라이가 13회, 페네르바흐체가 22회로 갈라타사라이를 압도한다. 리그 2위 이상의 성적을 거둔 시즌을 합치면 페네르바체가 41시즌으로, 우승+준우승 시즌 35회의 갈라타사라이를 앞선다. 그리고 페네르바체는 1959년 쉬페르 리그 정식 출범 이후 초대 우승팀이다.
페네르바흐체는 구단 공식홈페이지에 튀르키예의 건국 영웅인 아타튀르크가 페네르바흐체의 팬이자 서포터였다고 밝히고 있는데, 갈라타사라이와 페네르바흐체와의 축구경기를 관람하던 아타튀르크가 자신의 옆에 갈라타사라이 팬 세 명, 그리고 페네르바흐체 팬 두 명이 있는 것을 보고 "여기도 3-3이네(당시 경기결과도 3-3으로 끝났다). 왜냐하면 난 페네르바흐체 팬이거든"라고 하였다는 일화와 함께 클럽의 빌딩이 화재로 전소되자, 가장 먼저 재건 기부금을 쾌척한 사람이 아타튀르크였다는 점, 그리고 직접 클럽에 방문해서 축사를 적어놓고 가기도 했다는 점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아타튀르크 자신이 군인 출신이었고, 군인들을 중심으로 창단된 페네르바흐체의 창단비화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2000년대 와서도 한때 자금난에 시달려 선수들에게 돈도 지급하지 못하던 갈라타사라이와 달리, 화려한 자본력을 가지고 있으며 경기장인 쉬크뤼 사라졸루 스타디움은 UEFA에게 4성 경기장으로 인정받아 UEFA컵 결승을 비롯한 국제대회를 치르기도 했다. 클럽 국제대회 성적은 1963-64 시즌 위너스컵(유로파리그)에서 거둔 8강이 첫 토너먼트 진출. 하지만, 라이벌 갈라타사라이가 먼저 1962-63 시즌 유러피언컵(챔피언스 리그) 8강을 거뒀던 것이 있었으며 이후로 페네르바흐체는 40년이 넘도록 클럽 국제대회 토너먼트를 넘지못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갈라타사라이와 베식타스가 80년대 유러피언컵 4강 및 8강을 거두고 2000년대 초반에 와서 각자 유로파리그 우승 및 8강을 거둘때까지 페네르바흐체는 토너먼트를 넘어서지 못해 갈라타사라이와 베식타스 서포터들에게 놀림받곤 했다. 그나마 4인자인 트라브존스포르도 토너먼트를 넘어선 적이 없긴 하지만 이걸로 위안을 받지 못한다.
이런 서러움을 떨친게 김연경 선수와의 일화로 국내에도 어느정도 알려진 아지즈 이을드름(Aziz Yıldırım, 1952년생)이 구단주가 되면서였다. 재벌인 그의 막대한 투자로 2007-08 시즌에는 호베르투 카를로스를 비롯한 유명선수들을 영입한 끝에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인터 밀란, CSKA 모스크바, PSV 아인트호벤과 같은 조를 이뤄 조 2위로 16강에 처음 올랐다. 그리고 16강전에선 전번 UEFA컵 우승팀인 세비야 FC를 만나 1승 1패 끝에 승부차기로 이기며 챔피언스리그 개편 사상 첫 8강 진출을 이뤘다. 8강전에서는 첼시 FC에게 덜미를 잡혀 탈락했지만 뒤쳐지지 않은 선전이었다..
출처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