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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아 CFC

또또아범 2025. 8. 13.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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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제노바에 연고를 둔 축구 클럽으로 이탈리아에서 현존하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구단이다. 유벤투스, 인터 밀란, AC 밀란에 이어 4번째로 많은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한 명문 클럽이자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단 네 팀밖에 없는 리그 무패 우승팀 중 하나다. 한 번만 더 스쿠데토를 차지하면 엠블렘 상단에 10회 우승을 상징하는 금별을 달 수 있다. 그런데 9번째 우승하고 100년이 지났다.

1920년대까지 전설적인 수비수 렌초 데베키 등을 앞세워 강자의 지위를 누리다가 그 후로는 강등과 승격을 반복하는 별볼일 없는 행보를 보였다. 그러다 2000년대 중엽 현 구단주 엔리코 프레치오시가 인수한 후 공격적인 투자로 2007-08 시즌부터 세리에 A에 안착하였다.

경영진의 협상력이 대단해 선수를 곳곳에서 싸게 사와 터뜨리고 빅클럽에 팔아치우는 기술이 가히 신의 경지. 현금을 받기보다 유망주 공동소유를 최대한 활용하고 그것도 터뜨린다. 스카우팅 능력도 대단한 듯 프레치오시는 16세의 리오넬 메시를 데려올 기회가 있었지만 포기했다고 한다. 밀라노의 두 클럽과 특히 우애가 돈독해 그 팀 팬들은 제노아를 '형제의 클럽'이라 부른다. 다만 너무 선수를 갈아치우는 통에 조직력을 맞출 시간이 부족해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는다. 다만 AC 밀란과는 이탈리아와 거리가 먼 국내에서나 형제노아라고 불러주는 것이지, 실제 현지 사정은 한 밀라니스타가 제노아 팬을 살해함으로써 밀란이 제노바로 원정가는 순간 최루탄까지 터뜨리는 전쟁통이 되었다

항상 세리에 A의 이적시장에서 가장 많은 선수를 사고파는 클럽이다.
축구왕 슛돌이의 배경이 된 클럽으로 여러모로 일본과 관련이 깊다.
세리에 B이던 시절 일본의 축구스타 미우라 카즈요시를 영입하고 2009-10 시즌까지 아식스 유니폼을 입기도 했다.
팀 명칭이 제노바가 아닌 제노아인데, 이것은 이탈리아 거주 잉글랜드인들의 클럽으로서 창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클럽 초창기 한동안은 이탈리아인들은 클럽에 가입할 수 없었다. 파시스트 정권 시기에는 한때 강제로 제노바로 개명당하기도 했으나 2차 대전 이후 다시 제노아로 복귀했다.

1893년 9월 7일 이탈리아에 사는 잉글랜드인들이 모여서 육상과 크리켓 클럽으로 설립되었다. 축구는 부차적인 스포츠에 불과했다.      게다가 영국 스포츠 클럽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인은 가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897년 4월 10일 축구 부서가 독립되었고 이탈리아 클럽으로 정착되면서 이탈리아인들도 허용하게 되었다.

세리에 A의 초대 시즌은 단 네 팀이 참가하여 하루에 토너먼트를 몰아서 하는 방식 등 틀이 잡히기 전이었는데 제노아가 선두주자로서 이득을 톡톡히 누렸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진나스티카 토리노와 인테르나치오날레 토리노를 꺾고 초대 우승팀이 되었다. 이듬해인 1899년 4월 16일에도 인테르나치오날레 토리노에 3-1 승리하면서 두 번째 우승, 1900년 대회에서도 라이벌 팀 삼피에르다레네세에 7-0 대승을 거두고 또 우승하면서 3년 만에 3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1901년에 제노아는 빨강-네이비 색상의 유니폼을 채택했고 이때부터 로쏘블루(rossoblu)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902년은 밀란 CFC에 패배해 처음으로 우승에 실패했으나 1903년과 1904년 유벤투스를 연이어 결승에서 꺾고 4,5번째 우승에 성공했다. 1903년 4월 27일에는 프랑스에서 FVC 니스와 경기를 벌여 3-0 승리를 거둬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국제경기에 나섰다. 다만 1905년 준우승에 그친 이후 제노아는 유벤투스, 밀란, 프로 베르첼리 등에 밀리는 신세가 되었다. 1908년 이탈리아 축구협회에서 외국인 선수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거친 항의를 받아들였는데 창단 이후부터 항상 영국인들로만 구성되었던 제노아는 이탈리아 축구 협회에서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다음해 협회는 이 결정을 번복하였고 제노아는 일부 스위스 출신 선수들과 함께 팀을 재건했다. 선수단 리빌딩에 나서면서 수용인원 25,000명 규모의 새 경기장인 스타디오 루이지 페라리스를 지어 1911년 1월 22일 공식 개장을 했다.

새로 창설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아주리의 주장을 맡은 렌초 데베키, 에도아르도 마리아니, 엔리코 사르디 등이 대표팀의 주축 역할을 했다. 끊임없이 파이프 담배를 피우던 영국 국적의 이탈리아 최초의 전문 감독 윌리엄 가벗은 제노아의 부흥을 이끌었으며 선수들로부터 Mister라는 별명이 붙었다. 1914-15 시즌 제노아는 북이탈리아 지역에서 우승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전국대회 경기를 하지는 못했고 전후인 1918년이 돼서야 우승식을 가졌다. 전쟁 후에도 제노아는 북부 지구에서 강팀으로 자리잡았고 1922-23 시즌에는 라치오를 상대로 결승전에서 1,2차전 합계 6-1로 이기고 통산 8번째 우승에 성공했다. 1923-24 시즌에는 북부지구 결승전에서 볼로냐를 상대로 2차전 폭동 사태를 맞아 2-0 몰수승을 얻었고 전국대회에서 사보이아를 1,2차전 합계 4-1로 꺾고 통산 9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이 시기 선수단에는 렌초 데 베카를 비롯하여 조반니 데 프라, 오타비오 바르비에리, 루이지 부를란도가 있었다. 그러나 남은 1920년대에 제노아는 1927-28 시즌 준우승에 그치며 더 이상의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클럽명이 영국색이 짙어 1928년 파시스트 정부로부터 제노바 1893 치르콜로 델 칼초(Genova 1893 Circolo del Calcio)로 강제개명되는 수모를 당했다. 현재의 리그 형태인 세리에 A 첫 시즌인 1929-30 시즌에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전신 암브로시아나에 밀려 2위로 시즌을 마쳤다. 1930년대에는 들쑥날쑥한 성적을 올리다가 1933-34 시즌 2부리그인 세리에 B로 강등당했다. 다행히 곧바로 승격하면서 세리에 A로 돌아왔고 1936년 줄리오 쿨리오로 회장이 취임한 뒤 1936-37 시즌 리그에서는 6위로 마친 뒤 코파 이탈리아에서 AS 로마를 상대로 마리오 토르티의 골로 1-0 승리를 거두며 우승에 성공했다. 1937-38 시즌에는 우승틴 암브로시아나-인테르에 승점 3점차로 3위를 기록했다. 1938 FIFA 월드컵에서는 마리오 페라촐로, 마리오 젠타, 세르조 베르토니가 우승 멤버로 활약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이전의 명칭인 제노아 CFC로 되돌아갔다. 1946년에는 지역의 다른 두 클럽이 합병한 UC 삼프도리아와 새롭게 지역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고 스타디오 루이지 페라리스를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종전 이후 제노아의 성적은 이전의 강팀과는 거리가 멀었다. 1951년에 클럽은 두 번째 세리에 B 강등을 겪었고, 2년 뒤인 1953년에 세리에 B 우승으로 세리에 A에 돌아왔으나 중위권에 머무르다 1959-60 시즌 다시 강등을 당했다. 1961-62 시즌 세리에 A 복귀에 성공했고 당시 국제 대회를 대신한 클럽대항전인 코파 델레 알피에서 1962, 1964년에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4-65 시즌 클럽 역사상 4번째 세리에 B 강등을 당했으며 감독 및 구단주가 자주 바뀌고 재정 불안에 시달리다가 1970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3부리그인 세리에 C로 강등당했다.

제노아는 1년 만인 1970-71 시즌 세리에 B로 복귀했고, 2년 뒤인 1972-73 시즌에는 세리에 A 승격에 성공하며 8년 만에 1부리그에 돌아왔다. 1년 만에 곧바로 강등된 뒤 1975-76 시즌 다시 세리에 A에 돌아왔다. 로베르토 로사토, 브루노 콘티, 로베르토 프루초 등이 있었으나 1977-78 시즌 득실점 1점이 부족하여 세리에 B로 강등되었다. 1980-81 시즌 루이지 시모니 감독의 지휘 속에 토토네로 도박 스캔들로 지난 시즌 강등된 AC 밀란에 이어 2위로 세리에 A 복귀에 성공했다. 그리고 1981-82 시즌 최종전에서 AC 밀란에 승점 1점차로 앞서 극적인 잔류에 성공했다. 후반 40분에 터진 마리오 파체다의 결승골로 나폴리에 승리하면서 이때 두 팀 팬들 사이 우호적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두 시즌 뒤 최종전에서 유벤투스에 패배하며 또 강등을 당했다. 라치오와 승점이 같았으나 상대전적에서 열세였다.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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